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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료

삼국지 위서동이전 한조 기사3

by T의Tistory 2021. 12. 12.

원문 및 해석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해석 중 이 색상의 한글은 필자의 해석으로, 정확하지는 않다)

校勘 120旣僭號稱王, 淮, 當作準, 見前濊國傳注. 爲燕亡人衛滿所攻奪, 

丁謙曰, 箕淮之王馬韓也. 據朝鮮史言, 避衛滿之逼, 率衆奪金馬郡居之, 自稱武康王. 金馬, 卽本傳, 王所治月支國, 今爲全羅道益山郡. 
[朝鮮]侯 (「汲古閣本」·「藝文本」에는 ‘淮’로 되어 있다. 淮이 아니라 당연히 이다. )이 참람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丁謙이 말하길, 箕淮은 마한의 왕이다. 조선사에 의하면, 위만의 접근을 피해 부하들을 이끌고 금마군에 자리를 잡고 스스로 무강왕이라 칭하였다. 금마는 즉 여기서 전하는, 왕이 다스리는 월지국으로, 지금의 전라도 익산군이다.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校勘 121, 毛本, 下燕字, 作以.不攻. 攻, 疑作改.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註 160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註 161爲界, 趙一淸曰, 潘韓譌. 兩漢志, 俱作番汗. 朝鮮遂弱. 
위략에 이르기를, 옛 箕子의 후예인 朝鮮侯는 周나라가 쇠약해지자, 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王이라 칭하고 東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王號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燕나라를 맞받아쳐(逆擊) 周 王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大夫 禮가 간(諫)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燕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燕나라도 전쟁을 멈추고(「汲古閣本」에는 ‘以止之’로 되어 있다. 毛本(17세기 모종강이 다듬은 것)에는 燕자 다음에 以가 붙는다.)[朝鮮을] 침공하지 않았다(攻 이라는 글자는 고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에 子孫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燕은 장군 秦開註 160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滿番汗註 161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趙一淸이 이르길, 번한()은 잘못된 것이다. 두 한지(漢志)에는 모두 番汗이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弱化되었다.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校勘 122水.註 162

趙一淸曰, 漢書地理志, 樂浪郡浿水縣, 水西至增地入海, 今大同江也. 溴字誤. 下同. 弼按漢書朝鮮傳云, 至浿水爲界. 浿水解見前高句麗傳.
秦나라가 天下를 통일한 뒤, 蒙恬을 시켜서 長城을 쌓게 하여 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朝鮮王 否가 王이 되었는데, 秦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政略상 秦나라에 服屬은 하였으나 朝會에는 나가지 않았다. 否가 죽고 그 아들 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중국에서] 陳[勝]과 項[羽]가 起兵하여 天下가 어지러워지자, 燕·齊·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準에게 亡命하므로, 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漢나라 때에 이르러 盧綰으로 燕王을 삼으니, 朝鮮과 燕은 浿(諸本에는 ‘溴’로 되어 있다.)註 162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趙一淸이 말하길, 한서지리지 낙랑군 패수현, 서쪽으로 물이 흘러 바다에 이른다. 지금의 대동강이다. 溴자는 오자다. 아래도 같다. 살피건데, 한서 조선전에 따르면, 패수를 경계로 삼는다. 패수는 앞의 고구려전으로 풀이된다. 
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校勘 123中國亡命 何焯曰, 故字當作收.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校勘 124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 亡字下, 似少一字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도망간 뒤, 燕나라 사람 衛滿도 亡命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東쪽으로 浿水를 건너 準에게 항복하였다. [衛滿]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中國의 亡命者를 거두어 朝鮮의 藩屏이 되겠다고 準을 설득하였다.

準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博士에 임명하고 圭를 下賜하며, 百里의 땅을 封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準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王宮]에 들어가 宿衛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準을 공격하였다.

準은 滿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弼按, 魏略所云, 與史記漢書朝鮮傳, 略同而較詳, 可補史漢朝鮮傳之缺.

丁謙曰, 朝鮮史相傳, 其國, 肇自檀君傳, 一千四十八年, 至周初, 箕子代興, 傳四十世, 爲燕人衛滿襲據其地.

班書, 記漢事, 故託始於滿. 眞番, 本朝鮮附屬番部, 七國時爲燕所略.

武帝, 破朝鮮, 改爲郡. 治霅縣, 在今奉天興廳邊外, 東南至鴨緣江地.

浿水有二, 唐書高麗傳, 南涯浿水, 指大同江, 而此傳浿水, 均指鴨綠江.

今攷據家, 但知大同江爲浿水, 不知鴨綠江亦有浿水之名.

蓋大同江, 在平壤南, 衛滿所都王險城, 卽平壤. 滿渡浿水, 而後居此, 則水在平壤之北可知, 證一.

涉何, 諭右渠還朝, 必經浿水, 證二. 左將軍, 擊破浿水西軍, 方得至王險, 證三.

右渠太子, 入謝天子, 至浿水引歸, 證四.

觀此, 傳中浿水, 皆指鴨綠江, 明矣. 臨屯亦番部. 後爲郡, 治東暆, 今爲朝鮮道江原道江陵府城.
살피건데, 위략에서 전하길 , '사기'와 '한서 조선전' 모두 상세히 비교하면 대략 같아서 한(漢) 조선전(朝鮮傳)의 부족한 내용을 보충할 수 있다. 

丁謙이 이르길, 조선사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그 나라는 스스로 창시하여 단군이라 전한다. 1048년 주나라 초에 이르러, 기자(箕子)가 대대로 부흥하여 40세라고 전할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그 땅을 습격하였다. 

조서를 공표하여 한(漢)나라 일을 기록하였는데, 위만이 비로서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진번(眞番), 조선은 번부에 부속되어 있다. 칠국시대(한나라 7왕조의 난 시기)때 연나라가 다스렸다. 

무제(武帝)가 조선을 공격하여 군으로 고치고 삽현을 다스렸다. 오늘날 국경(만리장성)밖의 봉천(랴오닝성)으로,  동남쪽으로 압록강에 이른다.

패수는 2곳이 있다. 당서 고려전에는 남쪽 끝을 패수라 하였는데, 대동강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패수는 모두 압록강을 가리킨다.

현재 고증하면, 대동강이 패수라는 것만 안다. 압록강에도 패수라는 이름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대동강은 평양 남쪽에 있다.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은 즉 평양이다. 패수를 건너 머물었던 즉 평양 이북에 있는 강이라는 것이 첫번째 증거이다. 

섭하(涉何)가 우거(右渠)를 회유하고 조정으로 돌아갈 때 반드시 패수를 지났다는 것이 두번째 증거이다. 좌장군이 패수의 서군을 격파하여 왕검성을 얻었다는 것이 세번째 증거이다. 

우거태자, 천자에 감사하여 패수로 돌아간 것이 네번째 증거이다. 

이로보아 중국에 전하는 패수는 모두 압록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임둔(臨屯) 또한 번부(番部)이다. 후에 동이를 다스리는 군이 되었다. 지금의 조선 강원도 강릉부성(江陵府城)이다. 

 

해석 잘못한 부분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자료 출처 :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jo_004r_0010_0070_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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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侯準旣僭號稱王, 淮, 當作準, 見前濊國傳注. 爲燕亡人衛滿所攻奪, 丁謙曰, 箕淮之王馬韓也. 據朝鮮史言, 避衛滿之逼, 率衆奪金馬郡居之, 自稱武康王. 金馬, 卽本傳, 王所治月支國, 今爲全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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