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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 자료

신안 안좌도 배널리에 묻힌 왜인 2

by T의Tistory 2023. 7. 26.

https://ancienthistory.tistory.com/53

 

신안 안좌도 배널리고분에 묻힌 왜인

신안 배널리고분군은 2011년 3월부터 7월, 2012년 11월부터 2013년 2월까지 2차례에 걸쳐 동신대학교문화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되었다. 총 3기가 발굴되었는데. 이중 3호분으로 명명된 고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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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널리 고분에 묻힌 사람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자료.

 

이전 글에서는 단순히 항해 중 망자를 처리하기 위한 방법이지 않을까 라고 추측만 했는데, 이에 대한 답을 유추할 수 있는 연구 사례가 있다.

 

해당 유적은 사천 늑도유적이고, 관련 연구 논문은 아래와 같다. 

방민규, 2012, '고고학 발굴성과를 통해 본 고대 한반도 남해안지역의 대외교류', "전통문화연구"10,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한국전통문화연구소.


고일홍, 2018, '고대 한반도 해상교류의 새로운 이해-이론적 검토를 중심으로-' , "인문논총"제75권 제2호,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고일홍의 논문 중 배널리 고분 피장자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둘째, 늑도에서는 많은 무덤이 발견되 었는데, 시신들은 신전장, 굴장, 복장 등 다양한 자세로 매장되었다. 이러 한 매장 자세의 다양성은 그 자체도 유의미하지만, 한반도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동남아시아에서는 널리 사용되었던 ‘복장’(즉, 엎드린 상태로 묻 는 것)이 확인된다는 점은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는 늑도 인골의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 서열이 인도네시아인과 높은 관련성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63) 늑도에서 다양한 출신지의 사람 들을 위한 매장 공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일홍 2018, pp 170)

 

위 글을 간단히 정리하면, 항해 중 사망한 인도네시아인이 늑도에 묻혔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확인 가능한 역소의 특 징으로는 다양한 집단에 의해 행해지는 종교적 의례, 다양한 집단을 위 한 매장지의 존재, 다양한 집단을 위한 숙박시설 등임을 파악하였는데,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요소들은 늑도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늑도가 그 경계지적 성격으로 인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와서 교역을 할 수 있는 중립적인 성격의 ‘역소’로 성장하였고, 이렇듯 중립적인 교역의 장소였기 에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그곳에서 머물고 또한 삶을 마감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결국 늑도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굳이 육지의 배후 세력을 내세울 필요가 없으며, 이는 실제 고고학 자료와도 잘 맞아 떨어 진다. (고일홍 2018, pp 171)

 

위 논문처럼, 사천 늑도에 인도네시아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묻혔다고 해서 그 지역이 인도네시아인들의 거점이라거나, 해상루트의 방비를 위한 지역으로 특정할 수도 없다. 

 

즉 신안 배널리고분 역시 무덤에 묻힌 사람이 왜인이라고 해서 그 지역이 왜인들의 거점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고대에는 국경선의 개념이 모호하다. 삼국사기를 보면 여러 요인으로 백제사람이 신라로, 고구려로 갔다거나 신라사람이 어디로 갔다거나 하는 내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중앙집권화된 고대국가가 되었다고 해도, 도서지방까지 행정, 군사, 경제적 장악이 되었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한 예로, 1885년 3월 1일에 일어난 거문도 사건을 들 수 있겠다. 러시아를 견제하겠다고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을 때 조선 정부는 3월 중순 무렵에 외신을 통해 점령사실을 알았다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근대에도 상황이 이러할진데, 고대에는 어떠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이처럼, 신안 안좌도의 배널리고분은 출토 유물상으로 보았을 때 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왜 출신의 무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당시 백제와 왜의 외교관계 등을 고려하면 그들이 한반도에 들락거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