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고 자료

나주복암리고분전시관 2

by T의Tistory 2022. 10. 6.

나주복암리고분전시관 두번째 이야기.

지난 글에서 복암리고분군 조성의 시대적 배경과 의의를 아주 간략히 언급하였다.

간단히 정리하면, 복암리 고분군 중 전면 발굴조사된 3호분은 대략 300~600년, 즉 4세기에 걸쳐 고분이 조성된 고분이라는 것, 이 고분의 발굴 성과가 당시까지의 역사학계의 통설이었던 "늦어도 4세기에는 이 지역이 백제에 완전히 복속되었다"라는 설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 글을 보면, 왜 4세기 백제 편입설에 의문을 갖게 되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관 내의 고분 모형이다. 발굴 당시의 모습을 1:1 크기로 재현되어 있다.

고분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그 옆으로 3호분 96석실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의 홀로그램이 상영되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 3호분의 주인공 격이나 다름 없는 96석실이 바로 맞이한다.
(찐 여담이지만, 무덤방 이름이 96년도에 발굴되어 96석실이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96석실은 발굴 당시 임시 명칭이었고, 발굴 조사 후 무덤방의 일련번호로 고유번호를 다시 정리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96년도 조사 성과를 발표하면서 사용된 임시 명칭이 너무 유명해지고, 고유명사처럼 되어버려서 보고서에서도 변경없이 사용했다고 한다.)

96석실의 무덤방의 구조는 고고학에서는 횡혈식석실이라고 하는데…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는 굴식돌방무덤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굴식돌방무덤의 특징은 위 사진에서 보는 것 처럼 연도라고 부르는 출입 시설이 있다는 것이다. 출입 시설이 있다는 것은 무덤을 한 번만 사용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덤방 안의 모습이다. 96석실의 가장 핵심은 돌방안에 있는 옹관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굴식돌방무덤은 백제의 고유 묘제라는 것이 당연한 이론이었다. 그리고 백제가 영산강유역일대를 장악하기 전에는 옹관고분이 토착세력의 묘제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런 정설 혹은 고정관념(?)에 .. 마치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진 듯 한 파장을 몰고 온 것이다.

백제식 무덤방에 토착세력의 무덤양식이 믹스되었다니?? 더군다나 그런 무덤방에서 최고 지배층의 전유물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금동신발까지…

바로 이 지점에서 부터 당시 연구자들도, "뭐지??" 하였던 듯 하다. 요즘 비속어가 유행이니까 여기서도 잠시 써보자면… "뭐지, 이 돌+I 같은 무덤은…" 이러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이런 인식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고고학에서 고분은 보수성이 매우 강하여 잘 변하지 않고, 전통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특정 세력의 아이덴티티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삼천포로 잠깐 빠지자면…개인적으로는 묘제가 그 집단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절대적'인 요소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령왕릉처럼 정무적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묘제를 쓸 수 있으니…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헌기록 등을 보면 신분에 따라 일상생활-옷의 색깔, 집의 크기, 가구의 목재 까지도-을 규제하는 기록이 있으니… 묘제를 통해 특정 정치체를 상정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긴 하다. 절대적이지 않을 뿐이다)

아무튼 이런 돌방이 발굴됨으로 인해 기존 설에 의문을 갖게 (연구자에 따라서는 의문을 먼저 가지고 있었는데, 이 고분이 발굴되었을 수 도…)되었고,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소위 "마한론"이 대두되게 되었다.

즉 마한은 백제에 편입되기 전의 토착 세력이었고, 그들의 묘제는 옹관고분이었다. 백제가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옹관고분은 소멸되었을 것이고, 지배층의 무덤 양식이 돌방으로 바뀌었을 거라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자료가 나온 것이다.

이런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는게 3호분의 7호 석실이다. 이 무덤방은 고고학계가 고분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확히 뒷받침 해 주는 것이다.

96석실을 보고 좌측 복도를 조금 걸으면 7호 석실이 있다

이 무덤방이 7호석실이다. 사진 아래쪽이 돌방이고, 위쪽으로 한 쪽이 뚫려있는 곳이 출입구이다. 여기서는 앞서 본 96석실과 뚜렷한 차이가 있는데, 그 첫번째가 무덤방의 모습이다.
96석실은 소위 구주계 혹은 영산강식 석실로 부르는 것으로, 돌방을 만들때 벽석의 가장 아래는 크고 넓은 석재를 쓰고, 그 위부터는 사람 머리 크기의 돌을 주로 써서 만들었다면, 7호석실은 네모반듯한 상자형에, 크고 넓은 석재를 사용한 전형적인 사비식 석실이다.
유물에 있어서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금으로 된 마름모꼴 장식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 블로그에서 한 차례 언급한 바 있으니 참고바란다)

이러한 7호석실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이 지역이 백제의 시스템에 완전히 편입되었음을 무덤방의 형식과 유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능형의 금제장식은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 왕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록에 따르면 금제장식은 왕족이 쓸 수 있다)

3편에서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