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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리뷰

백제의 관모ᆞ관식과 지방통치체제

by archaeologist 2022. 1. 3.
항   목  내   용
논문명  백제의 관모관식과 지방통치체제
저   자 이남석
출   처 한국사학보 33집, 고려사학회
1. 서론 연구사
○  
 
문제제기 ○ 발굴자료 증가로 기왕에 일반화된 백제사에 대한 수정의 필요성 제기됨
 
연구목적 ○ 관모·관식의 이해
○ 고대국가 백제의 지방사회 실상과 통치방식의 이해 
관모 관식의 존재양상에 정치, 사회의 변화상 반영되어 있음을 입론
 
2. 본론 자료검토 1) 백제의 관모·관식
    금동관모 - 공주 수촌리(토광묘/석실분), 서산 부장리(토광), 익산 입점리(횡혈식석실), 나주 신촌리(옹관),
                     고흥 안동고분(석곽), (천안 용원리-관모장식 추정)
    금제관식 - 무령왕릉, 복암리 3호분 7호석실
    은제관식 - 부여 하황리 전세품, 부여 능안골 33, 45호분, 부여 염창리 42호분, 논산 육곡리 7호분
                     남원 척문리 폐고분, 나주 복암리 3호분 5호석실 및 16호 석실, 나주 흥덕리 석실분
2) 백제 의관제와 관모·관식
    - 관모와 관식은 장식품의 기능을 함과 동시에 통치 질서체계의 상징물
    - 의관제 기록 : 백제본기 고이왕대 / 삼국사기 잡지 색복조 -> 백제 의관제 제정 시기는 특정할 수 없음
    - 은제관식은 기록의 의관제와 부합하는 반면, 금동관모는 기록과 부합되지 않음.
   
분석 ○ 관모·관식의 시공간적 존재 특성
1) 시간적 존재특성
  - 관모·관식의 연대는 백제 묘제의 전개 틀 속에서 파악 가능 

금동관모
  - 토광묘 : 수촌리 1호분 금동관모,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 횡혈식석실분 : 수촌리 4호분(5세기 중반), 입점리 1호분(5세기 후반)
  - 옹관묘 : 신촌리 9호분(5세기)
  - 분구묘(목관) : 부장리 5호(5세기 중반)
  - 석곽묘 :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5세기), 천안 용원리 9호분(4세기말 ~ 5세기 전반)
금제관식  
  - 전축분 : 백제 무령왕릉(6세기 전반) 
  - 횡혈식석실분 : 나주 복암리 3호분 7호석실(6세기 중반)
은제관식 
  - 횡혈식석실분 : 부여 하황리 전세품, 부여 능안골 33, 45호분, 부여 염창리 42호분, 논산 육곡리 7호분
                            남원 척문리 폐고분, 나주 복암리 3호분 5호석실 및 16호 석실, 나주 흥덕리 석실분
  - 대체로 6세기 후반 ~ 7세기 초반으로 편년됨.
 
2) 공간적 존재특성
금동관모 - 도읍지를 제외한 백제 지방사회 전역에서 출토 / 지방의 고유한 전통문화 속에 포함됨
은제관식 - 도읍지 포함, 지방사회 전역에서 광역적으로 분포 / 백제의 제도권 속에서 출토(정형화된 묘제)
   
성격 1) 금동관모와 담로제
금동관모 - 백제적 특성이 함유된 유물. 출토지역에서 자체 제작된 것이라 보기 어려움. 위세품으로 제작되어 상위집단에서 하위집단으로 사여된 것. -> 4세기말~5세기대에 한하여 백제 중앙에서 제작하여 지방 유력자에게 하사한 위세품. 백제의 의관제 범주에서 이해될 수 없는 것. -> 담로 또는 왕후제와 관련된 것임.
  방군성제보다 선행하는 지방통제 방식으로 담로제 이외의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금동관모의 존속시기의 지방통제는 담로제라는 수단으로 설명.
  담로 = 4세기후반 무렵부터 백제의 지방사회에 금동관모가 사여되던 시기의 지방사회. 금동관모는 담로의 우두머리들이 백제 중앙에서 사여받아 정치적 위계를 확립하되, 강인한 독자성 유지한 것.

2) 은제관식과 방군성제  
은제관식 - 대체로 6세기 중반 이후에 출토 / 백제 묘제가 횡혈식석실로 통일. 
              - 사비 천도 이후 지방통치체제 발달 -> 의관제 실행 

* 백제사회는 관모와 관식이 금동관모에서 은제관식으로 전환되는 것은 중앙에서 지방의 일원적 통제 시스템이 완비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
   
3. 결론 ○ 관모와 관식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의 산물로, 금동관모는 담로제 혹은 왕후제에 의한 지방통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고, 은화관식은 방군성제의 산물이며, 이 때 의관제가 시행된 것으로 파악함.
 

은화관식에 대해서는 대체로 통일된 견해에 해당됨.

금동관모 및 금동관의 경우에는 이견이 많음. 

이 논문에서는 금동관모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담로제"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전제한 뒤, 

담로의 우두머리들이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강하게 유지하면서, 강인한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함.

백제 중앙에서 사용하지 않는 금동관모를 지방의 담로에게 사여하고,

금동관모 사용 집단은 전통문화를 유지하면서 강인한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과연 백제의 지방통치라 할 수 있는지 의문임.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은 지방통치라기 보다, 논문에서 언급한 "담로"와 백제가 대등한 입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