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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리뷰

백제 의관제의 정비시기 검토-은화관식과 금동관모를 중심으로-

by archaeologist 2021. 12. 26.
항   목  내   용
논문명 
百濟 衣冠制의 정비시기 검토 -銀花冠飾金銅冠帽를중심으로-
저   자 나용재
출   처 사학지 제53집 (2016.12)
1. 서론 연구사
 백제 의관제에 대한 연구는 복식사 관점과 제도사 관점 2가지로 대별됨. 
○ 한국 고대사에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에 어려움이 있음.
문제제기 ○ 백제 의관제에 대한 기록이 시기적으로, 내용상으로 서로 다름
○ 백제 의관제의 정비시기와 변천양상 파악 어려움
○ 최근 은화관식과 금동관모 등 고고학 자료 증가에 따라 이를 통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음 
연구목적 ○ 은화관식과 금동관모라는 자료가 백제 의관제의 정비시점을 파악하는데 있어 어떠한 유용성이 있는지 검토
백제 의관제 정비시기의 하한 시점과 상한 시점을 제시하고자 함
2. 본론 자료검토 ○ 백제 의관제에 대한 문헌기록 검토함
     삼국사기 /  주서 /  수서 / 구당서
○ 문헌기록으로는 백제 의관제 정비 시점을 밝히기 어려움
    - 고이왕대(3세기후반)에 의관제를 정비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후대 사실이 소급되어 기록된 것이라 판단함.
    - 중국 정사 기록은 6~7세기의 사실이 반영되었다는 김영심의 견해를 따름
○ 고고자료로 확인된 은화관식은 문헌에서 전하는 의관제 정비 시점의 하한으로 판단함.
○ 금동관모는 의관제 정비 시점의 상한을 추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유물
    - 기록이 없어 의관제 정비 시점과 직결되는 유물이라 단정할 수 없음. 
    - 저자는 3가지 점에서 의관제와 관련된 자료로 주목함
       1. 금동관모의 제작기법, 문양, 출토 유구를 통해 제작 시기, 제작 국가에 대한 분석 및 비교 가능 함
       2. 은화관식과 금동관모 모두 관(冠)의 범주에 속하고, 재질 차이는 있지만 금속이라는 점에서 연관 가능성 있음
       3. 현존 문헌기록에서 금동관모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으므로 의관제 정비 이전에 사용되었을 가능성 있음
분석 ○ 13점의 은화관식 검토
  - 출토 유구 : 미륵사지 석탑, 남해 남치리 1호분 제외 모두 능산리형석실에서 출토
  - 유적 시기 : 6세기 중반 ~ 7세기
  - 유구와 연대를 고려하면 백제 의관제는 6세기 중반에 정비된 것이라 할 수 있음.


○ 9점의 금동관모 검토
  - 출토위치의 특징 : 한성과 그 인근에서는 출토되지 않음
  - 금동관모의 중심연대는 5세기대로 추정
  - 금동관모를 활용한 의관제가 문헌보다 선행하는 것을 의미.
  - 금동관모 사여가 중단되는 시점이 문헌상의 의관제가 시행되는 것
  - 금동관모의 주인공으로 보는 견해 : 담로의 수장, 왕·후, 중앙에서 활약하다 귀장한 백제 관료 등 다양함 
      => 모든 견해가 백제 중앙조직에 속한 인물이며, 지방에 대한 직접지배의 산물로 이해한다는 공통점 가짐
   

성격 ○ 저자는 2가지 점에서 은화관식의 연대를 5세기 말~6세기 초로 올려볼 수 있다고 함.   
    1. 은화관식이 실제 사용되었던 것을 부장한 것이라면, 제작시기는 그보다 빠르다. 
        - 미륵사지 서탑 출토품: 수리한 흔적 있음 -> 실제 의관용품으로 사용되었음을 반영하는 것
        - 고분 출토품 은화관식 역시 실사용되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음   
    2. 무령왕릉 출토 금제관식         
        - 공반 유물 중 수리한 흔적이 있는 것, 명문이 있는 것 등으로 보았을 때 실제 사용하던 것을 부장한 것.
        - 구당서의 기록과 일치되는 자료라 할 수 있음  
○ 은화관식은 6세기 초반에 제작, 사용되고 있었음. 금동관모는 은화관식에 선행하는 의관용품임.

○ 저자는 백제의 금동관모가 중앙정치조직이나 지방에 대한 직접 지배체제와 연관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함. 
       - 신라의 예를 통해 간접지배의 산물로 이해함.
       - 5세기 백제의 상황은 지방을 통제하기 어려운 시기였음. => 간접지배 또는 우호관계를 위한 위세품
       - 금동관모의 사여 중단은 백제 중앙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 강화의 결과이며, 직접지배로 전환되면서 은화관식으로 대표되는 의관제가 정비된 것으로 파악함.

○ 문헌에 기록된 백제의 의관제는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에 정비된 것이라 파악함.
3. 결론 문헌상의 의관제 정비 시기는 5세기 후반 ~ 6세기 초반이라 판단함. 
○ 문주왕 때에 탐라의 사신에게 은솔이라는 관직을 내렸다는 것을 고려하면 한성 말기에는 의관제가 정비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리뷰

●  山本孝文("三國時代 律令의 考古學的 硏究", 서경문화사, 2006, pp.154-155.)가 지적한 바와 같이 관식을 매장하는 풍습이 어느 시기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음.   -> 의관제는 기록에 따라 정비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관식을 부장하는 풍습은 나중에 허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음을 지적함

● 고고 유물이 의관제 시행시기의 상한과 하한을 결정하는 결정적 근거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음.

     => 고고 유물은 제도 시행의 상하한을 결정하기 보다, 관식 부장 풍습의 상하한을 보여주는 것임. 

● 금동관(모)를 지방에 대한 백제 중앙의 직접지배 산물로 볼 수 없다고 지적한 것에 동의함.     -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백제 왕권은 지방을 직접지배할 정도로 안정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음.     - 의관제 정비 시점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고이왕대 기록은 후대의 사실을 소급한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관련 논문을 검토해 보아야 함.     - 지금까지 확인된 의관제 관련 기록에서는 금동관(모)에 대해 언급된 바가 없음. (만약 고이왕대 기록대로 의관제가 정비되었다고 한다면, 금동관(모)는 백제 의관제와 맞지 않음. 즉 백제의 지방지배를 뒷받침하는 유물이라 하기 어려움.)

● 금동관(모)는 백제의 지방 지배방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물임에 틀림없음. 일부 연구자는 금동관(모)의 제작기법을 분석하여 백제 중앙에 의한 사여가 아닐 수 있음을 제기하기도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