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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 자료

신안 안좌도 배널리고분에 묻힌 왜인

by T의Tistory 2022. 1. 10.

신안 배널리고분군은 2011년 3월부터 7월, 2012년 11월부터 2013년 2월까지 2차례에 걸쳐 동신대학교문화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되었다. 

총 3기가 발굴되었는데. 이중 3호분으로 명명된 고분에서 석곽 1기가 조사되었고, 석곽 내에서 다수의 철제 무기류와 갑옷 등이 출토되었다.  

배널리3호분 석곽의 실측도면 및 유물 배치 상태(발굴보고서에서 발췌)

 

발굴조사자와 학계에서는 이 고분의 주인공을 왜인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그 연대는 5세기 전반(기원후 400~430년 정도)으로 본다. 

 

 왜인이 이 지역에 묻히게 된 배경에 대해서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배널리고분의 출현과 관련하여 먼저 당시의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상황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백제 아신왕 5 년(396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58성과 700촌을 빼앗고 왕제와 대신 등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사건이 발생한다(광개토왕비 영락 6년). 이듬해 백제는 고구려에 대응하는 정책으로 태자 전지를 왜 에 인질로 보내면서 외교를 한층 강화한다(삼국사기 아신왕 6년). 또한 아신왕 11년(402) 5월에는 왜국에 사신 을 보내 大珠를 구하였고, 다음해 2월에는 왜국에서 사신이 내방하기도 한다(삼국사기 아신왕 11년 및 12년).

  그 후 아신왕이 서거하자 전지는 왜 군사 100인의 호위를 받으면서 귀국하여 우여곡절을 겪고 405년에 왕위 를 계승하게 된다(삼국사기 전지왕 원년). 그리고 전지왕 5년(409)과 14년(418)에는 왜와 사신을 교환하기도 하고(삼국사기 전지왕 5년 및 14년), 428년에는 왕의 누이 신제도원(新齊都媛)을 7부녀와 함께 왜에 보내기도 한다(일본서기 응신 14년).

  이외에도 『일본서기』에는 5세기 전반대로 추정되는 응신기(應神紀) 14년에 백제왕의 봉의공녀(縫衣工女) 헌상기사, 궁월군(弓月君)의 귀화전승, 응신기 15년에 아직기(阿直伎)와 왕인(王仁)의 도왜기사(渡倭記事) 등 백제와 관련 기사가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비유왕 2년(428)에는 왜국에서 종자 50인을 이끈 사신이 내 방하기도 한다(삼국사기 비유왕 2년).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백제-왜의 통교는 4세기 후반~5세기 전반까지 급속히 증가한다. 나아가 396년에 고구려가 한성을 위협하고 왕족이 포로로 끌려가는 등 국가의 존망이 걸린 사건이 발생하자 그 이듬해부터 왜 와 왕족외교를 시작하고(연민수 1997) 그 행보도 빨라진다. 즉 고구려에 의해 수세에 몰린 백제가 왜와 외교를 통해 타개책을 모색하는 다급함이 엿보인다.

  한편 일본열도의 왜는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해 기존에 유지해 오던 금관가야와의 교류에 큰 제약을 받게 되었 다. 철 등의 문물수입에 차질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당시 열도의 왜는 수장 간의 정치·경제적 경쟁이 상존하고 있었고, 이 경쟁체제의 중요한 요소가 철과 대륙문물의 안정적 확보였는데 그 통로가 제한된 것이다.

  이처럼 백제는 고구려에 대응할 군사가 필요했고 왜는 철과 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양측의 이해관계가 합치 되어 적극적인 통교가 이루어졌다. 수세에 몰려 있던 백제가 왜의 군사를 동원하여 대방계를 공격한 사실(광개 토왕비 영락 14년), 5세기 전반에 서일본지역에서 갑주부장이 급격히 늘고 또한 소규모 고분에서도 갑주가 부 장되는 것은(田中晉作 2002) 이러한 상황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백제와 왜의 통교는 그 교통로인 연안항로의 안정적 유지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일본서기』의 구이신 왕 즉위기사에서 木羅斤資의 아들 木滿致가 父의 공으로‘ 專於任那’하다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홍성화 2009), 이처럼 백제 8대성에 들어가는 목씨 세력이 가야에서 체재한 것은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을 지 속시키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연안항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연안항로는 404년 왜 가 대방계를 공격할 때 반드시 지났을 교통로이자, 405년에 전지가 귀국할 때의 교통로이기도 하였다(삼국사기 전지왕 원년).

  당시에는 선박기술의 한계로 구조선을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김재근 1989) 연안항로상에 중간기착할 수 있는 다수의 거점을 두어야 했을 것이며 더욱이 고구려가 남진하여 남부의 금관가야까지 진출하는 등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통로에 대한 군사적 방비가 더욱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군사를 파견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가 고구려와 전투에서 왜의 군사를 활용하고 있듯이(김현구 2009), 연안해안의 방비를 위해 일본열도에서 파견된 왜 군사를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서남해안을 따라 축조된 배널리고분과 외도고 분, 야막고분, 그리고 안동고분은 왜의 군사를 활용하여 연안항로를 방비하던 거점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이정호 2014). 배널리 3호분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타난 고분이며 갑주, 철경, 철검과 대도 등 부장품의 높은 위상에도 불구하고, 고분의 입지가 도서지역이고 본 섬에서 이격된 무인도라는 점은 바로 한정된 고분 피장자의 위상과 활동 범위를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동신대학교문화박물관, 2015, 「신안 안좌면 읍동·배널리 고분군」pp138~139. 

위 보고서의 견해 중 역사적 배경, 즉 백제에서 왜로부터 군사력을 지원받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연안항로 유지에 필요한 중간 기착지를 방비하기 위해 왜인을 주둔시켰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남해안 지역에 비교적 규모가 큰 왜계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어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으나, 신안 배널리고분의 경우에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고분이 위치하는 곳은 현재 간척지가 만들어져 본 섬과 연결되었지만, 과거에는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간척 전에는 생활기반이 거의 없었던 작은 외딴섬'이었다. 즉 연안 방비를 위해 주둔할 수 있는 곳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금의 해안 초소 정도라면 이해가 되겠지만, 그런 곳에 고분을 만들었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남는다. 

  두번째는 고분의 구조이다. 보고서에는 '석곽'이라고 명명되어 있으나, 내부에서 목관의 흔적 또는 목관에 이용된 관못 등이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묘의 너비도 56cm 정도로 좁다는 점은 목관 없이 시신을 바로 안치했다는 것(즉 매장주체부는 석곽이 아니라 석관으로 봐야 할 것이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분의 규모 역시 직경 5~6m, 높이 70cm로 작은 편에 속한다. 출토유물의 위상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고분 구조와 규모는, 다소 긴급하게 조성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출토유물 중 토기류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고분에서는 다수의 토기 등이 출토되며, 제례 행위의 흔적들도 나타나는데, 배널리 3호분에서는 토기류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다수의 무기류와 갑옷,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망자가 사망당시 착용하고 있던 것들만 부장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불어 보고서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갑주를 중심으로 창(철모)을 놓은 위치를 보면, 망자를 기리기 위한 추모의 의미로서 무기류가 부장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추모행위 역시, 당시 소지하고 있던 것들로만 이루어진 셈이다. (최근의 전쟁 영화에서도 이런 모습은 볼 수 있다. 총을 꽂고 그 위에 철모를 올려둔다거나 하는.....)

  그렇다면 배널리고분은 생활 기반이 없는 작은 외딴섬에 왜 긴급하게 만들어졌을까? 필자는 이 답을 '선원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제17조(수장)
 선장은 항해 중 선박에 있는 사람이 사망한 경우에는 해양수산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수장(水葬)할 수 있다.

  선원법의 위 조항은 2021년 6월 15일자로 법이 개정되어 수장과 관련된 내용은 사라졌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법률이 2021년까지 남아있었던 배경이다. 

  항해 중 누군가 죽게된다면, 그것은 남은 사람들의 보건, 위생과 직결되는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겨울이라면 조금 덜 하겠지만, 여름이라면 순식간에 시신이 부패되고, 심하면 다른 이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했을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위 법률처럼 누군가 죽게되면 선장이 직권으로 수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시에는 연안항해를 했기 때문에 수장을 하지 않더라도 연안에 정박하여 시신을 매장했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신분이 낮은 선원이었다면 수장했을 수도 있겠지만, 배널리고분의 주인공처럼 갑옷과 무기를 소지할 정도라면, 단순한 선원보다는 높은 신분이었을 것이 자명하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배널리고분의 주인공은 왜인의 무장계층이라 생각된다. 왜인들은 백제의 요청에 의해 파견된 군사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신안 배널리 일대가 그들의 주둔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배널리고분의 주인공은 백제로 항해하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하게되어 '생활 기반이 없는 작은 외딴섬'(오히려 무인도라 긴급하게 매장하기 용이 하지 않았을까?)에 묻히게 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물론 향후 배널리 고분 주변에서 주거지 또는 목책과 같은 당시의 유적이 확인된다면, 당연히 보고자의 견해대로 배널리고분 주변을 연안 항로 방비를 위한 거점 혹은 주둔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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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안좌도 배널리에 묻힌 왜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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